8. 선함은 언제 드러나는가?: 흄 VS 칸트
선악을 넘어서 윤리의 세계로
1. 스피노자는 윤리와 도덕을 구별하려 했다.
스피노자 =
- 인간은 마주침의 존재라 생각
- 그 마주침이 코나투스(우리의 삶의 의지)를 증가시키는 경우를 '좋음', 감소시키는 경우를 '나쁨'이라고 이야기했다.
- 즉 '좋음과 나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마주침이 일어나기 전에는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2. 스피노자의 윤리: 윤리적인 행동이란 좋음을 지향하고 나쁨을 피하는 것.
3. 스피노자의 도덕: 도덕 법칙이 인간의 자유로운 마주침을 부정하면서 출발하는 것.
- 도덕이 미리 결정되지 않은 좋음과 나쁨을 느끼기 전에 미리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 결정해 놓았기 때문에
4. 니체 또한 스피노자의 사유에 공감했다.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야기함.)
- 선과 악이 공동체적 차원의 논의라면, 좋음과 나쁨은 우리 개체 차원의 논의다. 선과 좋음이 일치하고 악과 나쁨이 일치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벌어지지 않지만, 불일치할 때는 정말 심각한 갈등이 불가피한 법이다.
- 선악을 따르지 말고,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따르라.
5. 스피노자와 니체의 사유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편에 서려고 한다.
- 이러한 사상은 국가나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불온하기 이를 떼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6. 하지만 이러한 혁명성은 희석되고 그 자리에는 동정심의 윤리학 혹은 자율의 윤리학이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흄과 칸트의 윤리학이다.
- 동정심과 자율의 윤리학은 결국 '도덕'의 변주된 형태.
7. 최근들어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동정심과 자율의 윤리학을 비판하는 핵심 논거로 부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선과 악이란 범주가 기쁨과 나쁨이란 범주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풍경이다.
흄: "고통의 경험으로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발생한다."
1. 쇼펜하우어의 동정심 = 형이상학적 감정
-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개체를 통해 이기성으로 드러난다. = 개별화의 원리
- 하지만 개별화의 원리를 미미한 정도로 파악하면 정의가 생기고
- 더 높은 정도로 파악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순수한, 즉 이기적이지 않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본래적인 착한 마음씨가 생긴다.
- 이것이 동정심이다.
2. 흄의 동정심: 경험론자답게 그는 동정심도 고통을 겪었던 우리 경험에서 타인의 경험을 추론하면서 생기는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칸트: "자율적 행동만이 선할 수 있다."
1. 윤리적인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로 표현할 수 있다.
2. 흄 = 동정심이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윤리적 근거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개인의 변덕이나 상황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3. 칸트 = 윤리를 변덕에 노출되어 있는 수동적인 감정 차원이 아니라, 감정이 변할지라도 항상 그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도덕 법칙의 차원에서 다시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 네 의지의 준칙을 보편화하라 = 우리가 선택한 행동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
- 자율적 주체 = 준칙을 만든 것도 자신, 그것의 보편성을 점검한 것도 자신, 그것을 행위로 옮긴 것도 바로 주체 자신.
- 이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아 위험한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보편적인 것일 수 없다.
- 하여 칸트는 동정심에 근거한 윤리적 행동이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 내가 만든 도덕 법칙을 내가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다.
- 도덕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자율의 모습이, 외적으로 강제된 도덕 법칙을 따르는 자의 모습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4. 그래서 프로이트는 칸트의 도덕법칙이나 도덕 의지의 작용이 주체의 자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검열 구조, 즉 초자아의 기능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 마음은 이드-자아-초자아로 구성
- 이드 = 신체에서 기원하는 본능의 힘을 상징
- 초자아 = 인간의 사회성에서 기원하는 문명의 힘을 상징
5. 프로이트에게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해 검열자나 재판관의 기능을 수행한다. 비록 양심의 명령이나 도덕적 의지인 것처럼 드러나는 경우라도, 결국 이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초자아에 의한 검열 과정일 가능성이 높다.
6. 만약 이 지적이 타당하다면 내면에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만한 증거가 거의 없다.
고찰
주체의 윤리학을 넘어 타자의 윤리학으로
1. 맹자는 사단(측은지심(동정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인간의 본성에서 직접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 이에 근거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윤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성선설)
2. 하지만 서양 주류 전통에서 동정심이란 누적된 자기 경험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다.(이것이 흄의 입장)
3. 하지만 윤리란 결단과 책임의 문제를 수반해야 한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그 행위자는 자율적 결단의 주체야야만 한다. (칸트의 입장)
4. 하지만 자율적 추제 역시 사회의 습관적 반응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칸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핵심 비판)
5. 표면적으로 흄과 칸트의 입장의 공통점 = 주체의 윤리학 즉 '일인칭'이라는 영역 안에서 발생한다.
- 결국 두 입장 모두 타자에 대한 고려가 없다. = 자신의 윤리적 행위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6. 20세기에 들어와 '주체의 윤리학'이 아니라 '타자의 윤리학'이 등장한다.
- 나의 동정심을 타자에게 관철시키거나 나의 윤리적 결단을 타자에게 적용하는 윤리학은 폭력적이다.
7. 동양의 타자의 윤리학
- 장자
- 원효 = '스스로 조심해서 선을 행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
- 자신이 타자에게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악이 될 수 있다는 깊은 성찰
- 주체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을 행했는지의 여부일 뿐, 선을 행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 타자의 윤리학은 기꺼이 자신의 선마저도 포기할 수 있다.
- 결국 주체의 윤리학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윤리학
- 타자의 윤리학 = 사랑의 윤리학
'책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 vs 철학 : 10장 타자는 왜 중요한가? (0) | 2021.07.22 |
---|---|
철학 vs 철학 : 9장 사유재산은 정당한가? (0) | 2021.07.21 |
철학 vs 철학 : 7장 소통은 가능한가? (0) | 2021.07.18 |
철학 vs 철학 : 6장 국가는 불가피한가? (0) | 2021.07.17 |
철학 vs 철학 : 5장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0) | 2021.07.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