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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

철학 vs 철학 : 7장 소통은 가능한가?

by 아련한 2021. 7. 18. 15:16

7. 소통은 가능한가?: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근대철학의 맹점, 타자

[짐멜]

시골에서의 만남 = 인격적 만남

도시에서의 만남 = 비인격적 만남

 

도시에서는 자신을 감점을 묻어둠

  1. 시골과 도시의 이런 만남에 대한 차이는 인구의 수 때문
  2. 시골에서처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인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됨.
  3.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내를 아는 척을 한다면 불쾌+감시당하는 느낌이 듦 → 이는 곧 자유의 침해

→ 인간은 비인격적 만남을 통해 자유를 얻음. + 고독도 함께 얻음

(→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타인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존재이기에 누군가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된다면 올인하게 된다. 그래서 도시인들의 사랑은 편집증적이다.)

 

결국 도시인들의 타자에 대한 반응은 이율배반(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명제 사이의 관계)적이다. → 여기서 다시 소통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타인도 나와 같이 코기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의 생각은 잘 알고 있지만 타자의 생각을 확실히 알 수 없다. →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독한 사유 주체들은 서로 무관심에 방치되거나 아니면 격렬한 갈등에 노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 홉스, 루소: 사회계약의 문제를 논의함. 계약을 통해 나와 타자가 원하는 것과 생각을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약속의 불이행이 존재하기에 근본적 해법일 수 없다.

그럼 어떤 방법이 존재할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알아보자. 그들의 논의는 현재에도 유효하기에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 "기쁨을 주는 타자와 연대하라."

데카르트 고독한 사유의 주체를 발견

스피노자 고독한 삶의 주체를 발견

 

스피노자

삶은 하나의 실체이고, 정신과 육체는 삶의 두 가지 표현, 즉 두 가지 속성일 뿐이다. 결국 삶이 사라지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정신 혹은 이성이 아니라 삶이 중심이 되는 순간, 육체는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다.

스피노자에게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

→ 코나투스 개념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계 = 의지

정신 + 신체 동시에 관계 = 충동

충동 + 의식을 동반 = 욕망 (인간과 동물의 차이= 자신의 의지나 충동을 의식할 수 있다.)

→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코나투스나 충동, 혹은 욕망이 먼저이고 의식적인 판단은 그다음에 온다는 사실.)

 

데카르트의 주장(의식적인 판단 혹은 사유가 우선, 의지나 욕망은 그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과 다름

 

스피노자

인간은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어떤 자극(=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받는다. 

쿠나투스의 증진 = 기쁨, 쾌감, 유쾌함의 감정이 발생함 = 자신의 삶의 의지가 증가됨을 직감함. → 고로 삶의 주체가 코나투스의 증가를 지향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실천하게 될 수밖에 없음. → 자신의 삶에 기쁨과 유쾌함을 가져다주는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끈덕지게 도모하고 유지해야 함. + 타자와의 유쾌한 연대를 가로막는 일체의 부정적인 힘에 맞서 싸워야 하며, 자신의 삶에 슬픔과 우울함의 정서를 가져다주는 타자와는 단호하게 단절해야만 한다.

 

라이프니츠: "예정되어 있는 소통에 조바심치지 말라."

라이프니츠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

'창이 없는 모나드' = 우리와 타자 사이에는 소통할 수 있는 '창'과 같은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자주 사용됨

 

분석명제 = 필연적 진리 = 주어만 이해해도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명제

종합명제 = 우연적 진리 = 주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참과 거짓이 결정되지 않는 명제 (진위 판단을 위해 경험을 필요로 함)

 → 신의 입장에서는 모든 명제가 필연적 진리.

주어가 될 수 있는 모든 개체의 내부에는 그에게 앞으로 붙여질 모든 술어가 미리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함. =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 카이사르에게 키스를 허락한다  → 카이사르나 클레오파트라를 창조할 때 그 속에 넣어둔 예정된 술어를 실현한 것에 지나지 않음.

 →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함

 

고찰
관계는 외재적인가, 아니면 내재적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 발견 = 인간의 유한함을 발견 = 한계가 존재한다 = 바깥, 외부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외부와 어떻게 관련을 맺을 수 있을까? = 어떻게 타자와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중세에는 신과의 관계, 근대 이후에는 타자와의 관계

 

[스피노자]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관계를 지속,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관계 지속 x

관계의 외재성

우리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쁠지 아닐지를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

세속적 타자와의 현실보다 절대적 타자의 은총을 더 중시. = 모두 신에 의해 예정됨 (스토아학파랑 실패랑 유사)

관계의 내재성

기쁨의 관계나 슬픔의 관계는 모두 내재화된 관계가 실현되어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관계의 외재성이 타자에 의해 결정되면 관계는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타자가 도입되는 순간, 그래서 관계의 외재성이 분명 해지는 순간, 관계의 내재성은 일종의 맹목적 신화라는 사실이 폭로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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