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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

강신주 <철학 vs 철학> 16장 마음은 언제 움직이는가?

by 아련한 2021. 8. 19. 01:54

16. 마음은 언제 움직이는가?: 하이데거 VS 메를로-통티

서양의 마음이 동양의 심과 만날 때까지

1. 서양철학자 칸트의 경우 감각이 먼저이고 마음이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2. 하지만 동양에서는 마음이란 물처럼 움직이는 유동적인 것으로 사유되었다. 하여 그런 마음이 먼저이고 감각은 그다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칸트 이후 서양의 사유 전통에서도 동양의 마음을 이해하는 철학자가 등장하게 된다.

3. 후설은 우리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향성들이 없이는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  

  • 이 후설을 통해 최소한 마음이란 쟁점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확보하게 된다.

하이데거: "마음은 낯선 상황에서만 깨어나 작동한다."

후설은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의 사유를 비판했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그의 지향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켰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지향하게에 앞서 인간이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자 했다. 

 

하이데거는 '배려함'의 관계 혹은 '손안에 있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이것은 우리의 세계 속에 친숙한 사물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하이데거는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하이데거의 견해는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평상시 사물들을 지향하지 않고 배려할 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지향할 때에는 사물들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뿐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에 후설은 모든 것이 인간의 지향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좁고 어두운 오솔길을 가다가 갑자기 환한 공터가 등장할 때, 공터가 바로 존재이다. 그리고 이 공터에 피어있는 히아신스 꽃이 존재자다. 환한 공터가 없었다면 히아신스는 나와 무관한 꽃이었을 것이다. '존재'가 없었다면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내게 지향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터-히아신스-히아신스의 존재 = 존재-존재자-존재자의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존재자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존재자의 존재 역시 판단이 불가능하다.

존재가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존재자를 지향하게 만든다.

 

메를로-퐁티: "마음은 몸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다."

후설의 유고의 특징은 초기 현상한 정신, 즉 마음의 능동적인 지향성이라는 발상이 좀 약화되고, '생활세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다. 후설 초기의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함'이라고 부르고 후기 현상학을 '생활세계의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후설의 생활세계의 현상학은 인간 마음의 능동적 지향성 이면에는 수동적 수용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후설의 말기 저작들을 숙고하며 철학적 통찰을 길러나갔던 철학가가 메를로-퐁티이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의식적인 지향 경험 이면에 신체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역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

 

고찰 현상학, 우리 시대 철학하기의 다른 이름

메를로-퐁티 이야기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나'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것, 체험한 것을 긍정하고 그것을 기술하는 순간 누구나 바로 현상학자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체험이 타당한 것인지 검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나의 체험일 뿐이다.

 칸트의 철학을 잘 배워서 그걸 적용하는 건 현상학이 아니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을 나의 체험으로 검증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결국 현상학은 바로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다.

이것이 현상학자들의 사유가 각각 달랐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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