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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

강신주 <철학 vs 철학> 14장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by 아련한 2021. 8. 8. 19:17

14.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칸트 VS 부르디외
칸트, 진선미를 구분하다.

칸트의 철학적 위대함은 진, 선, 미라는 세 영역을 분명히 구별했다는 데 있다.

칸트 이전의 시대에는 진선미를 삼위일체로 생각했다. 참된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 선한 것은 참되고 아름답다... 등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선이고 플라톤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칸트에 의해 선함에 의해 지배되었던 아름다움이 독립하여 아름다움은 참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고 선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탄생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선미의 세계가 우리가 가진 관심이 이론적 관심(진리)이냐, 실천적 관심(선, 윤리)이냐, 아니면 무관심(아름다움)이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

하지만 진선미의 세계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분별력을 얻어야만 한다.

 결국 칸트에게 있어서 분별력 있는 사람 또는 배운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론적 관심이나 실천적 관심 또는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 배우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이는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의사가 그렇지 못하고 환자를 동정함으로써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의사의 본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과 같을 것이다.

 

칸트: "무관심한 관심에서 미적인 것은 탄생한다."

칸트 미학의 핵심은 '무관심'하게 보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의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무관심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다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정신 상태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다루는 미적 대상은 '미'와 '숭고' 두 가지 종류다.

 

미는 자발적 무관심의 상태

무관심하게 바라보았을 때 만약 어떤 대상이 만족을 준다면, 그 대상은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사과를 바라보았을 때 식욕과 같은 다른 관심이 전혀 개입하지 않아야 무관심한 만족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무관심은 우리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생기기 힘들다. 이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학습된 결과이다.

 

숭고는 비자발적 무관심의 상태

폭풍우나 거대한 폭포와 같이 상상 이상의 풍경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관심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때 느끼는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표현할 수단이 없을 때 발생하는) 미적 감정이 바로 '숭고'의 감정이다.

 

'미'나 '숭고'가 모두 미적인 감정일 수 있는 것은 우리 내면에 '무관심의 상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칸트의 미학은 부르주아의 미학일 뿐이다."

칸트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계층에게만 적용될 만한 것이었다.

 

이에 부르디외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이 구별 짓기의 본능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미적 취향이라고 이야기한다.

부르디외는 칸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칸트의 순수 미학과 구별되는 대중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중의 미적인 판단은 감각적 쾌적함이나 윤리적인 메시지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든 미적인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즉 '관심을 가진 미적인 판단'을 지향하려고 한다. 예로서 죽은 병사의 사진에서 반드시 전쟁의 비정함 혹은 인생의 고통과 같은 구체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무관심한 예술적 차원에서 사진을 보려는 부르주아 계층의 취향과 구별될 만한 것이며,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에 따라 '미적 취향'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의 무관심한 미학은 관조적 미학을, 그래서 현실에 무관심한 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현실의 모순에 등을 돌리도록 할 수 있다. 순수예술이라는 허구적 공간을 만들어 현실의 변화를 원치 않는 자본가들이나, 현실을 변화시킬 용기가 부족한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정신승리를 구가할 수 있는 길을 만든 셈이다.  바로 이것이 칸트의 미학이 가진 정치적 효과이다.

[근데 어차피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미학을 느끼지 못하므로 어떤 영향력을 실제로 끼치진 못했을 것 같다.]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가치를 남기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강박증처럼 새로움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던은 포스트 모던해야만 즉 모던을 넘어서야만 계속 모던함을 유지할 수 있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강박증과 칸트의 숭고미를 연관시킨다.

새로운 물품은 더 새로운 물품 앞에서 옛 것일 뿐인 것처럼 칸트의 숭고미를 강제했던 폭포나 암벽 또한 반복적으로 본다면 처음 그 숭고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리오타르는 산업자본이 생산한 새로운 상품의 운명과 구조적으로 같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르디외는 미를 느끼는 학습된 무관심의 이면에는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하는 계급적 관심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고

리오타르는 숭고라는 감정이 일회적 감정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이는 칸트의 미학이 부르주아 계급과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고찰
관람의 미학에서 창조의 미학으로

1. 아우라는 단독성에서 유래하는 유일무이하다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기술복제시대에서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위축되고 있다.

부르디외의 무의식적인 취향 그리고 리오타르의 새로움에 대한 강박 또한 아우라와 연관되어 있다.

 

2. 플라톤 칸트 부르디외 리오타르 모두 창조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관람객일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관람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3. 창조의 미학은 주변의 인간관계와 권력관계를 의식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한다. 자신과 예술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워버린 어린아이와 같은 내면을 같는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예술가는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4. 예술가는 신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끌리는 사람이지만, 평론가는 자신의 정신으로 예술작품을 포획하려는 사람이다. 하여 예술가는 어린아이와 같고 평론가는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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