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역사는 무엇이 움직이는가?: 헤겔 VS 마르크스
'역사적'이라는 말의 의미
대상의 의미는 대상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도 특정한 의미 부여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새로운 주체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부여는 가벼운 수준이 아닌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관철하려 할 때에만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주체나 새로운 대상의 출현,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의미 부여가 발생한다면, 바로 이로부터 비로소 역사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역사는 의미의 단절 혹은 의미의 변화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변화는 주체의 실존 양식의 변화 및 대상의 경험 양식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역사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혹은 현존하는 사회를 변혁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의미의 체계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리고 역사적 인물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만든 인물에 대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철학은 의미의 재구성에 주목하는 학문이다.
헤겔: "역사는 절대정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근대사회에서 신을 대신하여 세계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좌에 오른 것은 인간과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가 열리는 것을 목도한 뒤, 오직 인간의 이성만이 진정한 역사의 동력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출현하고 그중 한 사람이 헤겔이다.
헤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현실적인 것 =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문명세계 = 경복궁
이성적인 것 = 인간의 정신 =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신
즉, 경복궁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이 외적으로 실현된 것.
헤겔에 따르면 '경복궁'을 보고서, 누군가는 그보다 더 발전된 건물을 '정신'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정신은 또 다른 '새로운 건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정신'을 개인이 아닌 '세계정신'으로 사유하고 있다. 앞 시대의 문명을 반성하여 새로운 문명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신은 세계정신의 한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이 성장하는 변증법적 과정, 정신이 발전하는 모양, 즉 정신현상학
= 처음에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현실적인" 규칙들에 순응한다.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규칙들을 자기에게 맞게 이용하기 시작한다.
이는 개인의 자기 극복 과정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개인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을 바꾼다. 그래서 헤겔이 말하는 인간의 이성 능력은 한 개인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서 전체 역사로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결국 개인의 정신은 세계정신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 "물질적 생산력이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킨다."
헤겔은 자본주의 사회가 정신의 최종적인 자기 현실화의 모습이라 평가했다. 이에 무슨 근거로 자본주의를 세계정신의 자기반성이 정지되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했는지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헤겔은 사고 과정이 현실세계의 창조자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했지만
마르크스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헤겔의 역사관을 비판하겐 된 이유는?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가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긴장을 내포하는 또 다른 반성과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는 생산력의 발달이 중세사회의 소유관계를 철폐시켰듯 생산력이 극한까지 발전되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철폐시킬 것이고 이어서 프롤레타리아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산력 중심주의를 비판했다. 자본주의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도 이 관점을 받아 들였지만 혁명에 주저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인간의 의지적 개입보다는 생산력의 필연적 발전, 즉 역사의 불가피한 변혁 과정을 더 강조하기 위해 생산력 중심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을 '현실이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코뮤니즘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을 지칭한다.)
생산력이 발전하면 코뮤니즘은 저절로 도래하며, 이런 역사의 발전에 대해 인간은 불가피하게 따라야만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헤겔의 '세계정신'의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안된다고 하였다.
칸트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구성적 이념'이 아니라 '규제적 이념' 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일국사회주의자들은 이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을 구성적 이념으로 이해했다.
고찰
제도적 마르크스주의 유감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출현한다. 그는 이것을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개인을 넘어서는 생산력 발달의 힘, 그리고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역사의 동력을 구체적인 개인들에게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헤겔의 절대정신처럼 개인을 초월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 찾을 것인가? 개인들이 역사를 끌고 가는가?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 개인들을 끌고 가는가?
후자를 강하게 독해한 것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동구의 일국사회주의다.
이해가 안가 (글자크기 5)
마르크스는 계급 없는 사회의 관념 속에 메시아적 시간관을 세속화했다. 뭔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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